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 소개
이탈리아 세리에 A의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밀라노. 홈 구장은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초창기 영국인들이 주도해서 클럽을 창설한 AC 밀란이 영국인과 이탈리아인만을 클럽의 선수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에 반대한 세력들이 AC 밀란을 탈퇴해서 모든 국가의 모든 선수들을 받아들이겠다며 창설된 팀이며 또한 직설적인 팀명[9] 과 Fratelli del Mondo(세계의 형제들)라는 단어를 팀의 프랜차이즈 모토로 사용함에 따라서 정체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10]
AC 밀란과 같은 경기장을 쓰는데, 정확한 공식 명칭은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Stadio Giuseppe Meazza)'로, 1980년 개명되었다. 주세페 메아차를 기리기 위해 구장의 명칭을 바꾸었는데 주세페 메아차는 AC 밀란이 아닌 인테르에서 전성기를 보낸, 최고 레전드 선수이기 때문에[11] AC 밀란의 팬들은 경기장의 명칭에 바뀌는 것과 바꿔 부르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개명되기 전의 공식 명칭은 경기장이 있는 지역구를 그대로 접목하여 '스타디오 산 시로(Stadio San Siro)'. AC 밀란의 팬들의 경우는 인테르의 주세페 메아차와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부르는 명칭이다.[12]
공식 클럽 명칭은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이지만 이름이 길기 때문에 보통 '''인테르'''로 줄여 부르며, 홈팬들도 인테르라고 줄여 부른다. 국내에서는 영어 표기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인터 밀란'''으로 부르기도 한다.[13] 이탈리아어 원 발음대로하면 인테르라고 해야 하지만 보통 알파벳 사용하는 국가들 같은 경우 각 나라별로 읽는 것이 보통인지라 영어식으로 차용해 ter발음을 테~가 아닌 터~ 로 하는 곳도 제법 많은 편이다.
통산 세리에 A 18회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을 차지했고,[14] 특히 2009-10 시즌에는 이탈리아 클럽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트레블'''을 달성했다. 인테르의 유러피언컵 우승이 특별히 값어치가 있는 건 이 때의 인테르가 공히 유럽 최강이라 할 만한 기세를 떨치며 짠물수비를 유럽 전역에 과시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인테르는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라 불리며 카테나치오를 완벽한 형태로 구현해낸 가장 최초의 팀이었다.
또한 인테르는 이탈리아 클럽 중 '''유일하게 단 한번도 세리에 B로 강등되지 않은 클럽'''이다. 다만, AC 밀란과 중간에 분리되다시피한 클럽이라 세리에 A 개근 멤버에는 속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팀들 중에서 인테르 다음으로 오랜 기간 참여한 클럽은 더비 라이벌인 AC 밀란이다.
2. 역사
2.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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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르는 1908년에 창단한 후 2년 만에 첫 우승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주장 겸 감독이었던 바르질리오 포사티가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포사티는 1차 세계대전때 1916년 6월경 이탈리아 동북부 국경에서 싸우다 전사했고 인테르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20년에 두 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면서 다시 한 번 안정화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다. 그러나 파시스트 정권 시기 1928년 밀라노 스포츠 연합과 강제로 합병되면서 유니폼이 강제로 교체됐고, 클럽명도 세 번이나 이름이 바뀌는 혼란기를 겪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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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암울했던 인테르는 주세페 메아차가 입단하면서 달라졌다. 메아차는 17살에 1군으로 승격한 이후 1929년부터 1934년까지 5시즌간 20골 이상을 득점하는 기록을 남겼고 팀의 성적도 덩달아 올라가면서 3회의 우승과 3회의 준우승을 거둔다. 그러나 메아차가 떠난 후 인테르는 1939-40 시즌 우승을 마지막으로 10년 넘게 스쿠데토를 들지 못하면서 클럽 분위기나 위상은 밑으로 추락하는데, 52-53 및 53-54 시즌을 연속 우승하면서 어느 정도 반등의 기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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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60년에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부임하면서 다시 한 번 반등한다. 그는 산드로 마촐라와 자친토 파케티를 주축으로 하여 마리오 코르소, 타르키시오 부르니치 등 우수한 선수들을 이끌며 62-63 시즌 및 64-65, 65-66 시즌의 세리에 A를 연속으로 우승함과 더불어 63-64, 64-65 시즌에는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한다.[16] 또한 유럽 챔피언과 남미 챔피언끼리 맞붙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1964년과 65년 모두 승리하며, 1960년대의 인테르는 그 유명한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라는 별명을 스스로 축구사에 당당히 증명해 보였다.[17]
1970년대에는 세리에 A에서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라는 조치가 내려지면서[18] 창단 이래 외국인 선수가 많았던 인테르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비록 71-72시즌에 준우승을 거두었지만 이후에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1980년대에 비로소 외국인선수 영입금지가 풀렸고, 1986년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부임하게 된다. 곧 인테르는 88-89 시즌 스쿠데토를 들어올리는데, 특히 그 유명한 AC밀란의 오렌지 삼총사에 대항하여, 게르만 삼총사로 대표되는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안드레아스 브레메를 과감히 영입함으로써 리그의 대권을 향해 보다 공격적인 행보를 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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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서도 91년 및 94년에 UEFA컵을 연달아 우승하며 그 저력을 보였지만, 인테르는 리그 패권을 AC 밀란과 유벤투스에 넘겨준 채로 여전히 중상위권 언저리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던 1995년, 과거 60년대 그란데 인테르를 이끈 구단주 안젤로 모라티의 차남 마시모 모라티가 구단주로 부임하면서 호나우두, 크리스티안 비에리 등의 슈퍼스타 등을 영입하며 다시 한 번 맹주로서의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지출에 비해 1998년 UEFA컵 우승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만한 성적이 없었다. 이 1990년대가 바로 인테르 역사상 리그 우승이 없는 유일한 시기(decade)였으며, 특히 93-94 시즌 때에는 리그 13위에 승점 31점을 기록하며 강등당할 뻔할 적도 있었다.[19] 더군다나 90년대의 세리에 A는 그 유명한 '''세리에 7공주''' 시대[20] 를 맞아 리그 상위권팀들이 매년 치열하게 엎치락 뒤치락하며 다투던 시기였기에, 웬만한 시도와 노력으로는 우승을 차지하기 힘들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인테르는 계속해서 여러 우승컵들을 간발의 차로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모라티 구단주는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으로 10년 가까이 구단에 지속적인 투자를 해왔고, 2004년에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이 부임하게 된다. 이후 인테르는 리그 3연패와 코파 이탈리아 2연패를 하면서 다시 회복세에 접어들게 된다.[21]
그 후의 역사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시즌별 일람 문서 참고.
2.2. 최근 시즌
3. 역대 엠블럼
엠블럼은 클럽의 설립자이자 화가였던 조르지오 무지아니가 만든 초기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엠블럼의 색깔은 청색, 흑색, 황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 청색과 흑색은 밤하늘을, 황색은 별을 상징한다. 원형 엠블럼 내의 영문은 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의 약어 FCIM이다. 뱀은 밀라노의 중심세력이었던 비스콘티 가문의 상징이다. 흰 바탕의 적색 십자가는 밀라노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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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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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네라주리'''라 불리는 파랑-검정의 줄무늬 유니폼을 착용한다.
5. 스쿼드
5.1. 유명 선수
- 이탈리아 국적
- 주세페 메아차: 1927-1940, 1946-1947
- 자친토 파케티 : 1960-1978
- 산드로 마촐라: 1960-1977
- 주세페 바레시: 1976-1992
- 알레산드로 알토벨리: 1977-1988
- 주세페 베르고미: 1979-1999
- 프랑코 카우시오: 1984-1985
- 마르코 타르델리: 1985-1987
- 가브리엘레 오리알리: 1970-1983
- 살바토레 스킬라치: 1992-1994
- 로베르토 바조: 1998-2000
- 안드레아 피를로: 1998-2001
- 크리스티안 비에리: 1999-2005
- 프란체스코 톨도: 2001-2010
- 마르코 마테라치: 2001-2011
- 파비오 칸나바로: 2002-2004
- 마리오 발로텔리: 2007-2010
- 티아고 모타: 2009-2012
- 왈테르 젱가: 1978-1994
- : 2011-
- 안토니오 카사노: 2012-2013
- UEFA
- 렌나르트 스코글룬드: 1950-1959
- 루이스 수아레스: 1961-1970
- 칼 하인츠 루메니게: 1984-1987
- 로타어 마테우스: 1988-1992
- 안드레아스 브레메: 1988-1992
- 위르겐 클린스만: 1989-1992
- 마티아스 잠머: 1992-1993
- 다르코 판체프: 1992-1995
- 데니스 베르캄프: 1993-1995
- 유리 조르카에프: 1996-1999
- 로랑 블랑: 1999-2001
- 로비 킨: 2000-2001
- 클라렌스 세도르프: 2000-2002
-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2004-2006
- 데얀 스탄코비치: 2004-2013
- 루이스 피구: 2005-2009
- 패트릭 비에이라: 2006-2010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2006-2009
- 고란 판데프: 2009-2012
- 웨슬리 스네이더: 2009-2013
- 사미르 한다노비치: 2012-
- 마테오 코바치치: 2013-2015
- 네마냐 비디치: 2014-2016
- 이반 페리시치: 2015-
- CONMEBOL
- 자이르 다 코스타: 1962-1967, 1968-1972
- 엑토르 스카로네: 1931-1932
- 다니엘 파사레야: 1986-1988
- 하비에르 사네티: 1995-2014
- 호베르투 카를루스: 1995-1996
- 디에고 시메오네: 1997-1999
- 호나우두: 1997-2002
- 이반 코르도바: 2000-2012
- 알바로 레코바: 1997-2008
- 아드리아누: 2001-2001, 2004-2009
- 에르난 크레스포: 2002-2003, 2006-2009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2003
- 킬리 곤살레스: 2003-2006
-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2004-2006
- 에스테반 캄비아소: 2004-2014
- 다비드 피사로: 2005-2006
- 줄리우 세자르: 2005-2012
- 왈테르 사무엘: 2005-2014
- 막스웰: 2006-2009
- 마이콘: 2006-2012
- 필리페 쿠티뉴: 2008-2013
- 루시우: 2009-2012
- 디에고 밀리토: 2009-2014
- 디에고 포를란: 2011-2012
- 프레디 과린: 2012-2016
- : 2013-2020
- 가리 메델: 2014-2017
- AFC
- 나가토모 유토: 2011-2018
5.2. 영구결번
인테르의 전설적인 두 풀백인 자친토 파케티와 하비에르 사네티의 등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있다.
6.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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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에 A에서 평균관중 수가 가장 많은 구단'''으로[22] , 7년 만에 챔피언스리그로 복귀한 18-19 시즌에도 1위였는데 리그 기준 평균 61,149명, 최대 78,275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유럽 전체에서 평균관중 순위 5위'''[23] 에 랭크되었다. 또한 세 번째 빅 이어와 트레블을 달성했던 2010년의 전성기엔 유럽 전체 축구 구단 서포터 수 순위 8위에 랭크 되기도 하였다.[24] #
인테르의 팬들은 흔히 '''인테리스티(Interisti)''' 혹은 '''인테리스타(Interista)'''로 자칭하며 [25] , 이 중 울트라스들의 경우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북쪽 관중석을 차지하므로 흔히 '''쿠르바 노르드(Curva Nord)'''로 불린다. [26]
그러나 경쟁 구단들에 비해 유럽을 넘어 전 세계적인 인지도와 서포터는 다소 부족한 편에 속하는데, SNS 상에선 페이스북 기준 유벤투스는 무려 3,900만명, AC 밀란이 2,400만명 수준의 팔로워 수를 자랑하는 데 비해, 인테르는 약 1,500만명 정도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고, 인스타그램 기준으로는 유벤투스가 2,900만명, AC 밀란이 610만명을 보유한 것과 비교하면 부족한 310만명 정도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인테르의 서포터들이 더 유력한 지역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현 회장인 에리크 토히르의 인지도의 영향을 받았고, 중국의 경우 인테르가 1978년 가장 먼저 방중한 세리에 A 구단이라는 점 때문에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2016년에 쑤닝 그룹이 인테르를 인수함에 따라 중국 내에서 큰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테르 클럽(Inter Club)이라는 공식 서포터즈의 지부 형태로 세계 각지에 팬층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며, 대한민국에서도 2018년 10월경 인테르 클럽 코리아(ICK)#라는 이름으로 인증을 받아 창설되었다. 여담으로 밀라노 본사에서도 의외의 지역에서 생각보다 많은 회원이 가입하여 다소 놀라면서 반가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27]
인테르 팬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유명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28] , 영국의 글래머 모델[29] 로 원래 아내와 막 이혼한 상태였던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에게 공개 구혼을 했고 그 뒤 인테리스타의 길로 접어든 에이프릴 서머스[30] 등이 있다. 그리고 금지어도 있다. 최근 모 이탈리아의 국회의원이 김정은도 인테리스타이며, 파울로 디발라를 인테르로 데려가려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축구선수 팬으로는 안토니오 카사노, 케빈 라자냐[31] , 니콜라 산소네가 있다.
2017년 발생한 프랑스 시위 과격 진압 사태의 피해자도 인테르 팬임이 밝혀졌다. 프랑수아 올랑드가 그를 면회하러 갔을 때 일반 환자복이 아닌 인테르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 # 본의 아니게 인테르는 이 사건에 연관되게 되었고 이 사람을 경기에 초청하고 싶단 의사를 밝혔다.
모란디 다리 붕괴사고의 희생자 중 콜롬비아인이 하나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인테르 팬클럽 콜롬비아 지부의 회장이었다. 그래서 인테르가 이 사람을 추모하기도 했다.
7. 라이벌
더비 매치로 엮이는 라이벌로는 이탈리아의 세리에 A의 명문 유벤투스 FC와와 AC 밀란이 있다. 각각의 더비 매치에 대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그 외에 같은 네라주리 유니폼에 롬바르디아 주 지역 라이벌인 아탈란타 BC와도 엮이지만 아탈란타의 팀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 치열하지는 않다.
8. 응원가
8.1. C'è solo l'Inter
8.2. Pazza Inter Amala
인테르를 대표하는 응원가 중 하나로 홈경기에서 킥오프 전에 이 응원가가 울려퍼진다.
9. 여담
9.1. 레알 마드리드와의 관계
인테리스타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구단은 다름 아닌 레알 마드리드였다. 일명 믿고 쓰는 레알산 - 믿쓰레''', '''우리 친구 등의 별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2000년대 중반 유독 레알에서 부진했던 선수를 영입시 클럽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큼 멋진 활약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트레블의 주역 베슬리 스네이더, 왈테르 사무엘,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레알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인테르에서 부활한 선수들이다. 그래서인지 인테르 팬들 중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꽤 많았고, 레알 마드리드 팬덤에서도 인테르가 09/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바르셀로나를 꺾은 바 있기 때문에 인테르의 이미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루카 모드리치 건으로 두 구단 사이는 틀어지게 됐다.
모드리치의 에이전트가 인테르에게 먼저 모드리치에게는자유계약으로 풀릴 수 있으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테르는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이었던 모드리치를 순순히 내 줄 리가 없으니 일단 기다리면서 AS 모나코로부터 케이타 발데를 임대해 오는 것에 주력했다. 그리고 모드리치에게는 훈련에 무단 불참하면서 구단에 대들며 태업하게 유도하지도 않았다. [32] 선임대 후이적으로 하려고 했던 건 보상금 명목이었다. [33]
모드리치와 에이전트 사단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스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이에 레알 마드리드는 인테르를 불법적인 사전접촉으로 고소할 예정이라고 한다. #
그리고 FIFA는 인테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지 않기로 하여 사건은 일단락됐다. #
그래도 이후 아쉬라프 하키미를 비교적 싸게 인테르에 내주는 모습을 볼 때, 구단 간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34]
9.2. AC 밀란과의 맞트레이드건
반면 더비 라이벌인 AC 밀란과의 선수 이동은 거의 극상성 수준으로 인테르가 손해를 본 트레이드가 많았다. 프란체스코 코코, 위밋 다발라 ↔ 클라렌스 세도르프, 다리오 시미치, 굴리 ↔ 안드레아 피를로 등이 있다.[35]
9.3. 팬사이트
국내 대표적인 팬사이트로 띠아모인테르가 있다. 상술한 공식 서포터즈인 인테르 클럽 코리아가 함께 운영되는 장소이며 대체적으로 여러 이슈들에 대해 운영진의 정리보다는 회원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트래픽과 라이트팬의 접근성 문제로 전용 사이트에서 네이버 카페로 옮기게 되었으며, 해당 사이트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9.4. 든든한 최후방과 최전방
골키퍼와 스트라이커 걱정을 하지 않는 구단으로도 유명하다.
골키퍼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왈테르 젱가 이후 잔루카 파굴리아, 세바스티앙 프레이를 거쳐 프란체스코 톨도 - 줄리오 세자르 - 사미르 한다노비치까지 잡음 없이 부드럽게 세대교체가 이어졌고 모두 다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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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커의 네임밸류 역시 화려해서, 1990년대 후반부터 호나우두 - 크리스티안 비에리 - 아드리아누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 디에고 밀리토 - 로드리고 팔라시오 - 마우로 이카르디 - 로멜루 루카쿠의 화려한 계보로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모두 제컨디션을 발휘하면 2년간 최악의 시기의 인테르를 먹여살렸던 팔라시오를 제외하고는 시즌마다 20골 이상 넣어주는 선수들이어서 중앙 공격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외에도 위르겐 클린스만, 로베르토 바조, 알바로 레코바, 에르난 크레스포 등 쟁쟁한 공격수들이 자리를 잡았던 클럽이다.
다만 한다노비치가 슬슬 노장에 접어들고 있고, 이카르디의 이적설로 대체자를 다시 찾아야 하는 입장인데, 일단 최전방은 맨유에서 로멜루 루카쿠를 영입해서 걱정을 덜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위의 수많은 선수들 중 왈테르 젱가, 파굴리아, 톨도, 비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이라는 점, 그리고 역대급 풀백인 파케티와 레전드의 정석인 하비에르 사네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풀백 계보는 다른 팀에 비해 의외로 부실하다는 점이 있다.
9.5. 우승 기록
2006년 유벤투스가 칼치오폴리로 몰락하자 인테르의 본격적인 독주가 시작되었다. 05-06 시즌부터 09-10 시즌까지 세리에 A 5연패를 차지하며 통산 18회 우승을 달성하자 팬들은 유니폼에 2번째 별이 생기는 것을 꿈꾸며 독주가 계속 이어지기를 원했다. 인테르의 레전드 사네티도 "인테르의 유니폼에 별 2개가 박히면 그때 은퇴하겠다." 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다음 시즌인 10-11 시즌 스쿠데토를 AC 밀란에 내주더니 그 다음 시즌부터는 유벤투스가 완전하게 부활해버려 10-11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마지막으로 유로파리그나 전전하는 중상위권 팀이 되어버린다. 이후 17-18 시즌부터 다시 챔스권까지 전력이 상승했으나 여전히 우승과는 거리가 먼 상태.
10. 역대 주장
11. 명예의 전당
매년 공식 홈페이지에서 후보를 선정 후 투표한다.
후보가 되는 조건은 인테르에서 60경기 이상 출전, 트로피 하나 이상 수상, 은퇴 후 이상
12. 같이보기
[1] 이탈리아어로 검정-파랑(Nero-Azurri).[2] 밀라노 방언으로 '사랑스러운 존재'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스포츠 기자 잔니 브레라가 붙인 애칭이다.[3] 이탈리아어로 '큰 뱀'을 일컫는다. 중세에 밀라노 및 롬바르디아 지역 전체를 통치했던 비스콘티 가문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밀라노의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같은 의미로 세르펜테(Serpente)라고 부르기도 한다.[4] 롬바르디아 방언으로 '허풍쟁이'라는 뜻이다. '국제주의'라는 인테르 창립 취지상 초창기에 좌파 지식인이나 부유한 상인 등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 영향이다.[5] Steven Zhang, 쑤닝 그룹 회장 장진둥의 아들로 중국식 이름은 장캉양(张康阳). 2018년 10월 27일 부로 완전한 회장이 되었다.[6] 2004년 12월 19일, 인테르의 팬 카페(https://cafe.naver.com/eauefa)가 생겼으나 현재 폐쇄된 상태. 지금 링크는 2019년 1월 20일 앞의 팬 사이트 띠아모 인테르가 이전한 카페이다.[7] 루카 토니와 공동 득점왕.[8] 치로 임모빌레와 공동 득점왕.[9] 이탈리아어로 Internazionale는 '국제'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여담으로 09-10 시즌 인테르의 베스트 11에 지목되는 선수들이 남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출신만 무려 8명에 육박했고 그중 이탈리아 인은 단 한 명도 없었던 팀이었다.[10]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탈리아 출신 레전드는 항상 있어 왔는데 당장 홈 경기장의 공식 명칭이 193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공격수 주세페 메아차에서 따왔으며, 2년 연속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한 '위대한 인테르' 시절에도 공격수 산드로 마촐라와 이후 구단주까지 되는 자친토 파케티, 그리고 말디니나 바레시에 조금 가려진 면이 없지 않지만 주세페 베르고미 역시 인테르의 이탈리아 출신 레전드 중 하나이다. 게다가 역대 이탈리아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통계를 내 보면 인테르 소속이었던 선수가 두 번째로 많다. AC 밀란은 3위. 1위는 당연히 유벤투스.[11] 물론 주세페 메아차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주세페 메아차가 말년에 AC 밀란에서도 뛰었기 때문이다.[12] 사실 그것보다는 '짧아서'라는 게 결정적이다. 홈, 어웨이 경기 구분은 각 서포터들에게 분배하는 티켓 수를 달리 한다고 한다.[13] 이는 같은 밀라노를 원고지로 하는 AC 밀란의 클럽명의 영향이 크다. 앞서 상술되었듯이 AC 밀란은 이탈리아인과 영국인이 중심이 되어서 만들어진 클럽이며, 인테르는 여기에 반대해 국적에 상관없이 받아들이자는 방침으로 세워진 클럽이다. AC 밀란은 공식적으로 도시명을 이탈리아어가 아닌 영어로 쓰고 있는데 인테르는 이에 반발해 이탈리아어로 쓰고 있다.[14] 세리에 A 우승 횟수는 유벤투스에 이어 AC 밀란과 공동 2위이며 챔스 우승 횟수는 AC 밀란에 이어 2위다.[15] 1928년에 소시에타 스포르티바 암브로시아나(Società Sportiva Ambrosiana(SS Ambrosiana)로, 1931년에 아소시아치오네 스포르티바 암브로시아나 인테르(Associazione Sportiva Ambrosiana-Inter)로 각각 구단명이 변경되었다. 팬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고 여전히 클럽명을 인테르라고 불렀다. 2차대전 이후 다시 원래 이름인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환원했다.[16] 만약 65-66 시즌까지 우승해서 3연패를 달성했다면 UEFA 영예의 배지를 부착함과 동시에 빅 이어를 영구적으로 소장할 수 있었지만,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1,2차전 합계 1-2로 패하고 탈락했다.[17] 이 중에는 63-64 유러피언컵 우승 당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버티는 레알 마드리드를, 64-65 유러피언컵 우승 때는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벤피카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18] 이 조치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이 당시 서독, 브라질, 네덜란드 등에 밀려 고전함에 따라 자국 선수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 내려진 조치였다.[19] 당시 강등된 팀인 우디네세의 승점이 28점이었다.[20] 유벤투스, AC 밀란, 인테르, SS 라치오, AS 로마, 피오렌티나, 파르마 칼초의 7개 구단을 일컫는 말이다.[21] 그리고 이때는 우연의 일치로 밀란 제너레이션을 구축하며 유럽을 호령했던 AC 밀란과 만년강자였던 유벤투스가 각각 멤버의 노쇠화와 칼치오폴리 사태로 하락세에 들기도 했다.[22] 경기장 관중석 대비 관중 동원률은 유벤투스가 압도적이지만, 두 팀 경기장의 관중동원력이 3만명 이상 차이 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23] 18-19 기준 1위 도르트문트 80,820 / 2위 바르샤 75,208 / 3위 뮌헨 75,000 / 4위 맨유 74,498 / 6위 레알 60,967[24] 이탈리아 내에선 AC 밀란이 7위에 오르며 정상을 지켰다.[25] 인테르 소속 선수들 내지 보드진, 스텝진들도 이렇게 불리곤 한다. 인테리스티는 인테리스타의 복수형이다.[26] 반면 AC 밀란의 팬들은 남쪽에 앉으므로 쿠르바 수드(Curva Sud)라고 불린다.[27] 기본적으로 정책상 비유럽 지역의 경우 연 회비를 납부하는 시니어 멤버가 25명 이상 필요한데, ICK는 무려 80여명이 참가하였다.[28] 인테르의 레전드인 하비에르 사네티와도 친하다고 한다.[29] 해외에서는 패션 모델과 글래머 모델이 구분돼 있다. 글래머 모델은 키는 좀 작아도 몸매가 좋으면 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단시간에 돈방석에 앉을 수 있게 해 주는 직업이라고 은근히 각광받고 있다고. 대표적인 사람은 킬리 하젤.[30] 본명은 나디아 포스터. 어쨌든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봄 여름 누님'''이라고 불리는 듯하다.[31] 이탈리아 본토 축구선수다.[32] 그리고 모드리치 본인이 일단 자신은 프로답게 전 팀과 좋게 이별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33] 당시 인테르가 FFP 징계를 받고 있던 게 가장 컸다.[34] 그냥 단순 해프닝으로 끝난 듯 하다. 그리고 브라힘 디아스가 맨체스터 시티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할 당시 상황만 봐도 페레즈의 레알은 타 구단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 생각한다. 이런 페레즈의 레알 조차도 사이가 안 좋은 구단이 있는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발렌시아 CF다.[35] 인테르의 트레이드 성적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96년도엔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이반 사모라노 영입을 위해 호베르투 카를로스에 현금까지 얹어줬고, 04년도엔 유벤투스에 낚여 칸나바로를 카리니 + 돈에 맞바꾸고, 08년에는 콰레스마를 업어오기 위해서 빅토르 위고 고메스 파쏘스 펠레에 약 2000만 유로를 얹어줬다.